숲을 믿는다는 것의 함의
심상용(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

   생명의 분위기(Lebensatmosphäre)
   믿음, 21세기에 참으로 듣기 어려운 말이다. 믿음도 좋지만 감시가 더 좋다.레닌이 한 말이다. 9.11 이후 미국 사회는 거대한 감시 시스템으로 변해왔다. 현대인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감시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타자에 장벽을 쌓고 스스로 고립되기로 마음먹는다. 감시와 고립의 이면에는 염세주의적 인간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깊은 곳에는 신뢰의 상실이 있고, 그 대가는 조금도 혹독하지 않다. 감시는 인간을 마비시켜 그 존재적 최상의 상태를 활성화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센에 의하면, 인간이 원천적 신뢰기초적 신뢰를 갖는데 있어 결정적인 조건은 아이 때 엄마의 사랑과 관심, 보살핌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 원초적 신뢰는 생명에 대한 불안, 두려움, 이질적인 사물에 대한 불신보다 더 강해, 이로부터 불신을 견뎌내는 믿음의 힘이 생겨난다. 신뢰는 사랑에서 오고, 사랑은 신뢰 속에서 자란다. 그렇기에 인간의 생명은 동물처럼 단지 살아 생존하는 것을 넘어 긍정되고, 받아들여져야 하고, 사랑받아야만 한다. 쉽게, 언제나 부정되거나 거부당하며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 오늘날 온갖 혐오범죄, 전쟁, 환경오염, 양극화 문제 등 이 문명이 처해있는 상황을 돌아볼 때, 신뢰의 기초가 무너져내려 (긍정과 관용, 보살핌이 아니라) 부정과 거부, 증오에 바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튀빙엔 대학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믿음의 생태학(Ecology of Faith)에 대해 말한다. 즉 믿음의 생명적 차원, 즉 신뢰를 통해서만 살아있음의 독특한 특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몰트만을 그것을 일컬어 생명의 분위기(Lebensatmosphäre)라 한다. 이효연이 제시하는 〈숲의 믿음〉연작에서 물씬 배어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생명의 분위기다. 우리는 <숲의 믿음 4_근원에 대하여>에서처럼, 우주선 기술 없이도 이토록 가까이에서 달을 볼 수 있다. 우주선은 달을 보여줄 뿐, 생명력으로 충만한 달을 보여줄 수는 없다. 기술의 한계요 예술의 가능성이다. 나는〈숲의 믿음 5-함께〉처럼, 나무 숲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실개천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이 문명이 숲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는 달리, 이효연은 숲에 믿음을 주고 숲은 그에게 더 큰 믿음을 줌으로써 가능한 생명의 분위기다. 레닌이 틀렸다. 감시보다는 믿음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결과가 좋다.

    두배는 더 진지하고, 세배는 더 따듯하게
  이 문명은 숲을 사용하는 것에 온통 관심을 기울인다. 사용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그르친다. 사용의 문명에서 달과 숲과 실개천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몽상가가 되어야 한다. 자원의 경제를 믿으면서 동시에 숲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몽상가는 자원의 경제(economy of resources)에서 자발적으로 추방자요 이방인이기를 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효연의 풍경은 몽상가의 풍경이다. 이효연의 세계에서 나무와 식물,  달과 호수는 비로소 생명의 분위기가 넘치는 것들로 존재한다. 사람과 자연과 우주가 이토록 가까이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긍정한다. 이 풍경은 계약을 체결하는 냉혹한 상호주의자들의 것도, 자신의 주장을 정의로 포장되는 선동주의자들의 것도 아니다. 이 숲은 의구심을 품은 몽상가, 한 번도 의심하지 않던 것들까지 의심하는이효연 같은 이들의 것이다. 이효연은 기포가 올라오듯이 조금씩 품어왔던 의심들을 작업에 녹여낸다.고 말한다. 이 의심은 부정하고, 거부하고, 증오하기 위한 사유의 방식으로서의 의심이 아니다. 긍정하고, 보살피고, 믿음을 주기 위한 다가섬의 관문으로서의 그것이다. 이 풍경을 이토록 다르고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만드는 힘이다.
  이 힘은 신록이 우거진 숲과 낙엽으로 덮인 언덕, 보르도 빛을 띤 황혼과 잔잔한 호수로부터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이 풍경이 다름과 차이를 장벽을 쌓고 빗장을 지르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결핍을 보완하는 치유의 근거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효연은 말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함께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은 나의 하루하루에 위로가 된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유쾌하게 지지해 주면 좋겠다.이 얼마나 고상한 미학인가. 적어도부르주아적인 것을 때려 부수자는 플럭서스의 모가 나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보다는 한 결 살아있음에 가까운 사변 아닌가. 모든 것이 다 예술이라는 사회조각론은 사변과 궤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적 광기로 흐르고 말았다. 이런 것들을 여전히 따라나설 참인가?근대주의적인 형식주의의 덧없음을? 상어나 어린 돼지를 두 토막 내는 감성의 격앙된 마비상태를? 
   이효연의 세계는 이 시대의 분기탱천하는 것들을 넘어, 살아있는 것들에 감격하는 예의를 갖추고서, 대립주의와 적대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미(美)의 천로역정을 시작할 작정이다. 계몽보다는 웃음을, 개념의 뾰족한 첨예함보다 조화로움을 택하면서, 두배는 더 진지하고, 세배는 더 따듯하고, 열배는 더 생명으로서 값하게 될 여정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
   이효연의 세계에선 열대 지역의 야자수, 사막의 선인장, 극 지방의 눈 덮인 침엽수림이 함께 자생한다. 사람들은 이 풍경들이 어딘가에 실재하는 장소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은 이 행성에는 부재하다. 이효연의 세계는 사전적인 의미의 풍경화, 즉 15세기 알베르트 뒤러의 계보를 있는 풍경화가 아니다. 그렇더라도 몽상의 세계에 전적으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와 식물들, 호수와 실개천, 폭포수 등은 비례가 비현실적으로 조정되거나 재구성되기는 했더라도 모두 자연에 실재하는 것들이다.
   실재하는 것들로 구성된 비현실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조정되거나 재구성된 비현실인 이 세계에서는 장르적 사유는 무용하다. 그렇다면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것인가? 하지만 오간다는 자체가 이미 경계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경계의 부정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 이 세계에선 자연과 탈-자연, 현실과 비현실, 풍경과 탈-풍경 같은 구분의 인식자체가 억지로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쓸모없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두 질서 간의 충돌이니 갈등이니 하는 가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실재하는 것들과 그것들의 비실재적인 구성은 의식의 직물을 짜내는 씨실과 날실 같은 것으로, 양자 모두를 통해서만 삶과 초월, 존재와 영원,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다가서는 것이 가능하다. 야자수와 선인장을 함께 키워내는 이 세계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유동하지만, 그 유동은 어지럼증과 구토가 아니라, 숨 쉴 공간을 터주는 유동성이다.
   상상이 더 정의롭고 더 책임을 지는 태도다. 아름다운 세계를 위해서는 사유의 이 차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예술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에 답하는 세계다. 회화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이다.(오늘날의 빈곤한 접근이 의아할 뿐이다) 이 효연의 회화는 마음의 눈으로 본 자연이요 세계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교하고 사실에 가까이 다가선다.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지만, 대상과 대상을 보는 자신을 동시에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그것은 이성적 분별력, 곧 구분의 인식과 구분된다. 그것은 종종 기억의 이편과 저편, 기억과 망각 사이에 상상의 교각을 놓는 것으로부터 긴밀해진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대상은 그것(it)이 아닌 너(you)가 되어, 냉혹하게 대상화되는 것을 넘어 그것 자체의 존재적 힘의 발현에 이르고, 이로부터 창조적 관계가 설정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 본 것을 기관으로서의 눈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며 종종 긴 시간과 진지한 노력을 요구한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오늘날 그 수가 크게 줄어들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시각예술가이다. 이효연은 그런 시각예술가들 가운데 한 명임이 분명하다.


[1]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윤리학, p.369. ​​​​​​​
An Implication of Trusting the Forest ​​​​​​​
By Shim Sang-yong (Seoul National University Art Museum Director)

Life atmosphere (Lebensatmosphäre)
Trust is a term that is really hard to hear in the 21st century. “Trust is good, control is better,” said Lenin. Since the September 11 attacks, American society has been transformed into a colossal surveillance system. Contemporary humans tend to isolate themselves not avoid hurt – not to be on a watch list. A pessimistic human sits crouched behind such surveillance and isolation. The loss of ‘trust’ is in a deep place, and its price is not at all terrible. Humans are paralyzed under surveillance, and their top existential conditions cannot be revitalized.
For the psychoanalyst Erik Erikson, the crucial condition of having primordial trust and basic trust lies in a mother’s love, attention, and care. As this primordial trust is stronger than any anxiety, fear, or distrust, the force of faith to overcome mistrust derives from this. Trust comes from love and love grows up in trust. “Human life has to be affirmed, accepted, and loved. That’s why it might be easily denied or becomes an object of hatred. I feel that the foundations for trust collapse and rest on negation, rejection and hatred (not affirmation, tolerance, and care) if looking back on the conditions of our civilization today facing all kinds of problems such as hate crimes, wars, environmental pollution, and polarization.
Jürgen Moltmann, Professor Emeritus at the University of Tübingen provides a commentary on the Ecology of Faith. The unique quality of ‘life’ can be manifested only by the life dimension of faith, i.e. trust. Moltmann refers to this as Lebensatmosphäre. What emanates from Trust in the Forest by Hyoyoun Lee is this life atmosphere (Lebensatmosphäre). As in Trust in the Forest 4_In Regard to the Origin, we can see the moon quite closely without any spaceship technology. A spacecraft is able to show just the moon, but it cannot show us the moon replete with the life force. I have never seen a beautiful brooklet flowing across a grove of trees as in Trust in the Forest 5_Together. This is the life atmosphere brought about by Lee’s giving trust to a forest and the forest giving trust to Lee. Lenin was wrong. The outcome of choosing trust is much better than that of choosing surveillance.

More earnestly, more warmly
This civilization only pays attention to how to exploit the forest. The relation of ‘use’ decisively mars the relation of ‘trust.’ You have to be a visionary to keep your faith in the moon, forests, and brooklets in this civilization of use. The visionary voluntarily tries to become an exile or stranger since it is impossible to trust the forest and the economy of resources simultaneously. In this respect, Lee’s scenes are visionary. In her world, trees, plants, the moon, and lakes are imbued with the life atmosphere. In this world, humans, nature, and the universe face and affirm one another. These scenes are neither for advocators of reciprocity who are so cold-hearted in their contractual relationships nor for propagandists who decorate their assertion as justice. This forest is for a visionary who has reservations or one like Hyoyoun Lee who “doubts what has never been doubted.” “I put a suspicion harbored in me into my work as if air bubbles rise.” said Lee. This suspicion is not a way of thinking to deny, reject, or hate but to affirm, take care, and give faith. This is the force that makes her scenes look quite different and so beautiful.
This force doesn’t come out from the hills that are clothed in fresh verdure, calm lakes, or sunset's glow. This derives from our recognition of these scenes not as the ground of differentiating each other but as the ground of comforting, complementing, and healing each other. “I’m consoled each day by representing the fact that we are different but share things together. I hope we can support each other,” said Lee. How refined this aesthetics is! This is much more lively than Fluxus’ angular, caressive practice that asserts, “purge the world of bourgeoisie sickness.” The theory of social sculpture based on the concept that “everything is art” flowed into postmodern madness in which speculation is indistinguishable from sophistry. Will you still follow these things? Evanescence of modernist formalism? The state of paralyzed sensibility snapping a shark or a little pig in two?
Lee intends to set out on a new journey toward beauty, and to go beyond confrontationalism and antagonism, being polite to all living things. This journey is worth rewarding with life earnestly and warmly, picking “laugher rather than enlightenment” and harmony rather than acuteness in concepts.

Seeing with the mind’s eye
Palm trees in tropical regions, cacti in deserts, and coniferous trees in polar regions grow together in Lee’s world. Although people hold that these scenes are somewhere in reality, the environment these plants inhabit does not exist on this planet. Lee’s scenes are neither like those with lexical meaning nor landscapes by Albrecht Dürer in the 15th century. All the same, her world is not only that of reveries. Trees, plants, lakes, brooklets, and waterfalls are all unrealistically readjusted or reconstructed in their proportions, but they all come from reality.
Generic thinking is of no use in this unrealistic world in which unrealistic things are adjusted or reconstructed to be seen as real. Does it mean crossing the border between reality and unreality? It is inappropriate in that ‘crossing’ itself assumes some border and underlines its negation. The ‘perception of distinction’ itself between nature and post-nature, reality and unreality, and landscape and post-landscape is nothing but a useless effort to bring forth controversial issues. There is no place for a hypothesis like the collision or conflict between two orders. Real things and their unrealistic compositions are like the fabric of our consciousness that enables us to approach problems such as life and transcendence, existence and eternity, and life and death. This world in which both palm trees and cacti grow together oscillates between reality and unreality, but this oscillation is flexibility for breathing, not simply causing dizziness or nausea.
This dimension of thinking is desperately needed for a beautiful world. Art is a response to seemingly impossible demands. Painting is a space where everything is possible. (We just doubt why we make some poor approach to this.) Lee’s painting is nature and the world seen from the mind’s eye. Seeing with your mind may be far more precise and approximate to the fact. The physical eye is needed to see an object, while the mental eye is necessary to see an object and oneself who sees this object simultaneously. In this sense, this is distinguished from rational discernment, i.e. our perception of distinction. This seeing with the mind is often to place an imaginary bridge between recollection and oblivion. When seeing with the mind’s eye, an object is able to reach a manifestation of its own existential force, thereby setting a creative relationship.
However, seeing with the mind’s eye and translating what we see with the mind’s eye in a language of our eyes as an organ is not simply the matter of an inborn gift or technology. This often requires a lot of effort and time. Those who underwent this process are in the truest sense visual artists whose number is rapidly decreasing today. Lee is obviously one such visual artists.

이효연 개인전 픽토하이쿠에 부쳐 - 임은신 2020
지난해 새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첫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시詩를 쓰고 싶다고 했다. 시인이 진행하는 수업도 들어보았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갑자기 시라니. 아니, 쓴다기 보다는, 시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 시의 형식은 하이쿠. 세상에서 가장 짦은 시란다. 그 형식을 빌어, 그림으로 시를 써보려고 한단다. 도대체 얼마나 짧길래, 그림으로도 쓸 수 있는 정도인걸까. 하이쿠가 무엇인지, 사전을 찾아보았다. 
 
*
하이쿠 はいく [俳句]. 명사. 일본의 5·7·5의 3구(句) 17음(音)으로 되는 단형(短型)시((본디 連句의 첫 구절이 독립한 것)). (=発句(ほっく))
 
이효연 LEE Hyoyoun은 그렇게 한 해 동안 오롯이 그림으로 하이쿠를 썼다. 그렇게 그리며 쓴 그의 시그림에 픽토하이쿠 PICTOHAIKU라는 이름을 붙였다. 추측할 수 있듯, 하이쿠haiku에 '그림의'라는 의미를 가지는 접두사 picto를 더한 것이다. 그림으로 쓴 하이쿠, 그림으로 쓴 짧은 시, 바로 이효연의 픽토하이쿠 PICTOHAIKU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소개하기 위하여 작가는 8편의 픽토하이쿠를 완성했다.
 
이효연의 픽토하이쿠 PICTOHAIKU는 대개는 세 작품이 한 편을 이루며 하이쿠의 3구(句)-3행 형식을 비교적 충실히 따른다. 간결하고 축약된 언어로 표현된 하이쿠는 자간, 행간에 숨어있는 암시와 여백, 여유를 읽으며 침묵과 기다림 속에 상상력을 자아내고 암시적인 것을 이끌어내게 한다는데, 픽토하이쿠 역시 그렇다.
 
간결한 듯 보이나 많은 것을 구석구석에 담고 있는 이효연의 그림시들은 우리로 하여금 숨어있는 암시를 찾아내고 그 안에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한 편의 픽토하이쿠는 첫눈에는 각각 다른 광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서 각각의 그림-각 행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법과 형식, 계기는 다양하다. 어떤 시는 첫 행(첫번째 그림)에서 큰 틀을 보여주고, 점차 그 안으로 점점 파고 들어가며 디테일을 노래하는가 하면, 어떤 시는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의 흐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그 순간순간의 화면을 분할하여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도록 노래하고 있으며, 또 어떤 시는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간에 바라본 모습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하나의 화면 안에 여러 시점이 동시에 존재하게 하면서 리듬감을 더해준다.
 
저 너머 Over There Beyondness (2020), 서로의 풍경 Mutual Scenery (2020), 그리고 초코하우스 Choco House (2020)는 바로 첫번째 형식의 픽토하이쿠이다. 각각 석 점의 작은 그림들로 이루어진 이 세 편의 그림시는, 마치 사진에서 풍경을 찍고, 그 다음 디테일 샷을 클로즈업 하며 찍듯 표현되었다. 그런데 클로즈업을 할 때 우리의 시선과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 처음 본 장면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지만, 동시에 우리 몸도 그 장면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가기도 하고, 옆으로 돌아가기도 하며,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또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격자 창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과 푸른 식물이 인상적인 저 너머(2020)에서 작가는 처음에는 건물 밖에서 방을 바라보고,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창가 옆에 가만히 서보기도 했다가, 또 건물 옆에 있는 나무를 직접, 그리고 가까이서 자세히 보기 위해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었을런지 나도 모르게 작가의 시선과 몸을 따라가며 움직이고 바라보며 또 함께 노래하고 있다. 그는 왜 거기에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왜 그 안까지 들어가서 굳이 다시 또 나왔던 것일까. 꽤 정성을 쏟은 것으로 보이는 벽돌의 다채로운 색감과 오렌지와 진노랑, 청록에 가까운 먹을 머금은 진초록, 그리고 민트빛의 세련된 색감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물 밖과 건물 안에서 보이는 햇살의 기하학적 모양의 변화와, 픽토하이쿠 저 너머(2020)의 마지막 행이자 오른쪽 끝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리하고 있는 초록잎으로 무성한 나무의 위치를 따라가보면, 이 시는 더웃 맛깔나다.   
 
이효연의 픽토하이쿠는 작가의 예전 작업들과 미술사에 대한 작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함께 부르기 즐거운 노래이다. 작품 하나하나에는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기존 발표작들과 아직 발표하지 않고 실험 중인 신작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다. 상상화들의 거실 Salon of Imaginary Paintings (2020)이 특히 그렇다. 2년 전 개인전 <친구꽃(2018, 도로시 살롱)>에서 이효연은 전시장 한 켠에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 표현했던 기이한 모양의 도형과 형태들로 이루어진 드로잉들을 선보었다.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지만 우리 머리 속에서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모양들. 다소 엉뚱하고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작가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쓱쓱 그려낸 흥미로운 형태들이 아주 다소곳하고 클래식하게 그려진 실내 풍경 안에 자리하고 있다. 슬쩍 보았을 때에는 잘 꾸며진 어느 귀부인의 우아한 살롱 같았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니 실재할 수 없는 기이한 상상화들로 가득하다. 이 얼마나 유쾌한 반항이고 매력적인 실내장식인가! 상상화들의 거실(2020)에서도 어김없이 각 작품을 이어주는 장치들이 존재한다. 첫번째 그림 오른편의 스탠드는 두번재 그림 왼편에 자리잡으며 첫번째 행과 두번째 행을 연결해 주고 있고, 두번째 그림 오른쪽의 푸른 식물은 역시 세번째 그림의 왼편에서 이파리를 팔랑거리며 두번째 행과 세번째 행을 연결해 주고 있다. 세 줄로 쓰여진 이 시는, 세 그림으로 쓰여진 이 시그림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여백의 행간 속에서 여유롭고, 평온하다. 그 여백은, 그 행간은 우리를 쉬게 하면서도 강력하게 다음 줄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고 싶어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석 줄의 시를 읽으며, 석 점의 그림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운율을 탄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Who Can Say Who I Am (2020)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와 북극해(1823-24)를 인용하고 있다. 앞서 상상화들의 거실(2020)에서 이효연이 자신의 그림을 재인용했다면, 이번에는 거장의 그림을 인용한다. 현대미술에서 명작을 차용, 인용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거장에 대한 오마주hommage이자 선배를 뛰어넘어보겠다는 치기어린 도전이기도 하다.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숙연하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독일 화가의 유명 작품의 주인공 방랑자를, 그의 또 다른 유명작품인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북극해와 마주하게 하여 자연의 웅장함과 위력을 극대화하면서, 이효연은 고독한 방랑자의 뒤로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을 그렸다. 아름답지만 춥고 스산하고 위협적인 북극해를 바라보고 있는 방랑자는, 우리는, 사실 뒤돌아보면, 한 발짝만 물러서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선인장이 잘 자랄 정도로 뜨겁고 정열적인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하다. 따스하고 화사한 정원은 20세기 초 클림트가 그렸던 정원을 연상시키는데, 선인장은 유럽의 정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이효연은 유난히 관계, 서로, 사이에 집중한다. 그가 야심차게 그려낸 대작, 사이와 사이 Between and Between (2020)은 바로 그의 관계와 서로, 사이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가 독일에서 잠시 지냈던 작업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던 건물의 풍경을 그렸다는 이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세 개의 필터를 넘어가야 존재하는 풍경이다. 첫째는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의 유리, 그리고 두번째로는 작가가 위치하고 있는 건물과 바라 보고 있는 건물 사이에 있는 공기, 더불어 그 사이에 있는 나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건물의 유리창. 이 세 필터를 넘어가야 비로소 작가가 보고 있는 대상들, 우리가 작가의 눈을 통해 보고 이는 대상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다다른다. 과연 이 세 번의 필터링을 거치면서, 그 거리를 건너가면서 우리는 그 안의 존재를,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하나의 화면을 스무개의 작은 화면들로 나눈 작가의 시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어떤 운율로 다가와야 하는 것일까.
 
되돌아보면, 이효연은 언제나 시적이고 문학적인 화가다. 꽤 많은 소설과 시를 읽은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전시의 제목들만 모아봐도 그렇다. <푸른 사이(2019, 희갤러리)>, <모두가 빛이 되고픈 시간(2019, 갤러리 아트비앤)>, <친구꽃(2018, 도로시 살롱)>, <환상통(2017, 비컷 갤러리)>, <내용이 사라져 버린 이야기(2015, 가비 갤러리)>, <풍경, 그리고 쉼표(2012, 두루아트스페이스>. 나열하다보니 무언가 이번 전시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 <픽토하이쿠 PICTOHAIKU> 에서 소개하는 여덟 편의 그림시들의 내용과 그간의 이효연의 작업을 총괄적으로 반하고 있다. 사실, 하나의 장면을 분할하여 그렸지만 각각 독립된 작품들을 다시 모아 작가 자신의 내적 리듬에 맞추어 여백을 두며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구성하는 방식은, 이미 십 여년 전부터 작가가 시도한 방식이다. 화면 분할, 클로즈업, 시점전환, 프레이밍... 이효연의 작업을 보면서 떠오르는 이 모든 용어들은 우연찮게도 모두 사진용어들이다. 그가 사진을 공부한 것이나 사진으로 먼저 장면을 수집하고 그 다음에 회화로 풀어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회화와 사진기법 그리고 시를 공부하고 연구한 작가는 이제 픽토하이쿠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번 전시의 작업노트로 몇 년전에 발표했었던 <내용이 사라져 버린 이야기>에 그 다음의 이야기를 덧붙여 보여주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이다.
 
"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이 하나, 둘 그림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삶의 행간에 시원한 바람같은 존재이고 싶다는 어려운 꿈 하나를 키우고 있습니다. 싹이 나왔으니 지켜봐 주시면 관심을 먹고 그 싹이 자라날 겁니다. 픽토하이쿠는 그림으로 시를 만들어 보겠다는 허무맹랑한 저의 꿈을 밀어부친 시간들의 흔적입니다. (2020. 5. 이효연) "
 
그의 바람처럼 누군가의 삶의 행간에 시원한 바람같은 존재가 되기를, 그의 작업이 우리를 그렇게 시원하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며 그가 틔운 싹에 물을 주며 싹이 잘 자라기를 함께 지켜봐주기를, 이 싱그러운 봄날에 이효연 LEE Hyoyoun 이 노래하는 픽토하이쿠 PICTOHAIKU의 운율에 몸을 맡기고 흥얼흥얼 노래하며 자유롭고 여유로운 힐링의 순간을 함께 즐겨보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Trans trend magazie 인터뷰 2013 여름호
이토록 아련한 거리
이효연 화가가 그리는 마음의 풍경

어둡거나 쓸쓸하거나 석양이 지거나 누군가가 홀로 전화를 걸고 있는 거리(street)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은 어둡거나 쓸쓸한 동시에 밝고 따뜻해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현실인가 하면 비현실이고 환상인가 하면 일상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거리(distance)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일까. 풍경은 저편에 있는데 마음은 이편에 와 있다. 때로 마음이 총총 길을 건너 저편의 풍경에 가 닿기도 한다. 하나의 화폭 안에 두 개의 거리를 그리는 화가 이효연. 그가 새로운 거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글 강은미

미대를 졸업하고 8년이나 침묵하다가 훌쩍 스웨덴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력이 독특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는 나라는 아니죠. 스웨덴에 연고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무턱대고 학교를 알아보고 연락해서 가버렸어요. 하고많은 나라 중 스웨덴을 택한 이유는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어서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시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굉장히 지쳐 있었어요. 사람들과 섞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서 스웨덴에 가서도 다른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거의 혼자 지냈어요.

타지에서 혼자 외롭지 않으셨나요?
외로웠죠. 그렇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제 마음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리 안에 있으되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제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특정 상황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어요. 작업도 치열하게 많이 할 수 있었어요. 뭔가에 집중하면 굉장히 몰입하는 편이라 작업할 땐 미친 듯이 작업하고, 나머지 시간엔 혼자 유럽 곳곳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입시학원에 있던 몇 년간 제 작업을 하지 못하면서 억눌려 있던 에너지가 그때 모조리 분출된 것만 같았어요. 스웨덴에서는 주로 판화와 사진 작업을 했는데, 판화는 에디션(edition)을 하나도 못 냈을 정도로 작품을 많이 했어요. 한 작품을 완성하려면 같은 작업을 계속 반복하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자꾸만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었던 거죠. 그만큼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마구 저지르는 나날이었어요. 매일 새벽 3시쯤, 차가 다 끊긴 길을 걸어서 집에 가곤 했어요.

그 새벽들에 스톡홀름 거리를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에 강이 있어서 매일 강을 따라 걸었는데, 조용히 강물이나 갈매기를 바라보고 걷는 날이 계속 되니까 모가 났던 마음이 많이 순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는 카메라가 친구여서 언제나 거리에서 풍경이나 사람을 찍곤 했어요. 나름 실험적인 아이디어도 많아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그런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도 했고요.

풍경을 화폭에 본격적으로 담은 건 2007년이니, 한국에 돌아와서네요. 사진을 찍을 당시 그림의 소스가 되리란 걸 염두에 두셨나요?
명확하게 염두에 둔 건 아니었어요. 언제 어떤 용도로 쓰일지는 잘 모르지만 그 순간 찍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면 일단 찍었어요. 이런 식으로 찍어두고 아직 손대지 않은 사진이 지금도 굉장히 많아요. 훗날 결국 그리게 된 풍경 사진들의 경우 미리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면 이런저런 의도가 개입됐을 텐데, 그게 아니다 보니 사진에 적당한 거리감이 유지될 수 있었어요. 한 발짝쯤 떨어져서 관조하는 느낌.

사진 자체는 그렇지만 사진에서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선 작가의 의도가 개입하는 거지요?
그렇죠. 제 그림을 보고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게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요, 그림을 그릴 땐 실재를 바탕으로 하지만 상상을 가미해 재구성을 합니다. 인물의 위치를 바꾸거나, 아예 지워버리거나, 반대로 사진에는 없던 사람을 넣기도 하는 등 조형적인 배치를 달리 하고, 제 임의대로 색상을 바꾸기도 합니다. 대체로 요소를 삽입하기보다는 줄이는 식으로 단순화 하고 있습니다.

풍경을 단순화하면서 동시에 환상적인 요소를 넣기도 하고요.
네, 풍경 안에 비현실적인 요소를 삽입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유명한 계단 뒤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거나, 청동으로 만든 동상 뒤에 전면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이 있는 풍경은 실제론 없는 풍경이에요. 그림을 보신 분들이 처음에는 대체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면 왜 계단 뒤로 바다를 그렸는지, 왜 바닷가에 테이블을 놓았는지 묻지만, 글쎄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좋지 않을까요? 바다가 거기 펼쳐져 있다면요. 테이블이 거기에 놓여 있다면요. 초현실적인 작풍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그림에서 꼭 사실관계가 확인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저는 많은 경우 직관에 의해, 뜬금없는 상상력에 의해, 그리고 그걸 그리고 싶은 제 마음에 따라 그려요.

실재하는 풍경 위에 마음의 상상을 덧댄 것이죠. 한편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를 굉장히 절제해서 그렸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꼼꼼하게 잘 봐야만 알아볼 수 있거든요.
자연스럽게 보이기를 바랐어요. 혹자는 비현실적 요소를 그림 안에 더 드러내놓고 확실하게 어필하지, 왜 눈에 잘 띄지 않게 그리느냐고도 하세요. 한 화면 안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강하게 충돌시키면 궁금증도 일어나고 독특함으로 주목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림 안에 이런 풍경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릴 뿐이지 주목 받기 위해 그런 요소를 부러 충돌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이걸 꼭 그리고 싶다는 마음의 목소리에 따라 그릴 뿐입니다.

그 마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닐진대 기본적으로 도시의 풍경을 담고 있다 보니 ‘현대인의 고독과 외로움을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요.
제 그림이 고독과 슬픔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그림을 통해 현대인의 소통 부재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해석을 하시는 건 전체적으로 어떤 쓸쓸함의 정서가 전해지기 때문이겠죠. 그림 속 풍경에서 자기 마음의 풍경을 발견하는 거니까 그런 반응에 대해 맞다 틀리다 말할 순 없어요. 작품이 제 손에서 떠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보시는 분들이 다양하게 해석을 하시는 거지요. 다만 저에게 이런 주문을 직접 하신 분이 있었어요. 더 지독하게 외로워지라고요. 그건 제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작가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잖아요. 제게 있어 행복은 그림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에요.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또 다른 고민이 찾아오고, 더 좋은 작업을 하고픈 마음이 커지기 때문에 관객이 기대하고 원하는 그림, 저로부터 보고 싶어하는 이미지만 그릴 생각은 없습니다.

작품 앞에서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이면 행복하세요?
회화란 게 어렵다면 어렵지만 그냥 보고 휙 지나쳐 버리기도 굉장히 쉽잖아요. 어디선가 말하길 관객이 그림 하나를 보는 데 평균 3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작가마다 또 관객마다 다르겠지만요. 행복한 순간은 제 그림이 관객의 발을 붙들어 그를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게 할 때죠.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거나, 마음을 건드린다거나 정서적으로 감응한다면, 그래서 그 누군가가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머문다면 작가로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아요.

이효연 작가의 발을 붙들었던 다른 화가의 작품은 무엇이 있었나요?
1996년도엔가, 지금은 없어진 동아갤러리에서 러시아 작가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회고전이 열렸어요. 전시장을 걷다가 한 작품을 보고는 그 앞에 붙들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너무나 유명한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인데요, 그 생생하고 치밀한 재현 능력에 완전히 반해버렸지요. 대학을 다닐 때니까 그림을 처음 그리는 단계여서 더욱 그런 면에 이끌렸는지도 몰라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는 회화적인 기법도 물론 뛰어나지만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독특한 정서와 분위기를 참 좋아하고요.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도 그림을 그리는 기법은 저와 180도 달라도 인간 본연의 감성을 다루는 점에서 좋아하는 예술가입니다.
요즘은 앨리스 닐(Alice Neel)이란 미국 작가에 빠져 있어요.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고 집안 형편은 어렵고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어도 꿋꿋하게, 유행이나 사조에 흔들리지도 않고 수십 년 간 자기 그림을 그린 분이에요.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무려 50년 동안 하나도 없었지만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70대가 되어서야 조명을 받았어요. 정말 용감하고 대단하신 분이죠. 삶 자체도 귀감이 되지만 특히 제가 요즘 인물 작업을 하고 있어서 그녀에게 끌리고 있는 것 같아요.

인물이라면 기존 풍경 작업과는 다른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신 건가요?
네, 초상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일단 지금은 사람의 뒷모습부터 그리고 있어요. 이게 어떻게 시작된 일이냐 하면, 누구에게나 뚜껑을 닫아 한 쪽에 놓아두는 상자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오래된 편지가 있거나 옛날 사진이 담겨 있는 그런 상자 말이에요. 생각이 많던 어느 날 어떤 상자 하나가 문득 궁금해져서 열어봤더니 스웨덴에서 처음 작업할 무렵의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다양한 사진을 많이 찍고 스크랩도 열심히 했던 때죠. 그 중에서 제 뒷모습 사진 한 장이 나왔는데요, 스웨덴에서 첫 전시회를 했을 때 갤러리에 걸린 제 그림을 보는, 저의 뒷모습이었어요. 그 사진을 보자 당시 제가 그 뒷모습을 저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어요. 사실 지금까지 제 그림에서 인물의 뒷모습이 많이 등장한다는 걸 저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고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 자화상 사진을 보고 난 후에야, 처음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제가 사람의 뒷모습에 이끌리고 있었단 걸 알게 되었어요. 뒷모습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본 적 없고, 숨기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는 또 하나의 방심한 얼굴이잖아요. 그런 뒷모습에 줄곧 마음이 움직였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람의 뒷모습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한 상태예요.

전작들은 그림 안에 공간만 있거나, 인물이 있더라도 이쪽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관찰하는 구조였습니다. 인물화라면 클로즈업 되어 가깝게 확 다가오게 될 텐데요, 사람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나 거리감에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나요?
사람에 대해 지치고 환멸감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죠. 그래서 홀로 외진 데 가서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했던 거고 인물을 그려도 가까이 그리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식이었고요. 음, 지금은 사람이 사랑스러워요.(웃음) 감정이나 마음은 크게 순환하는 것 같아요. 한 시기에 어떤 특정한 상태가 있을 뿐 그 상태가 평생 고착되는 게 아니죠. 돌고 도는 거예요. 예전에 힘들고 어두운 시기가 있었다면 지금 제 삶은 밝고 만족스러워요. 이렇게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작업을 계속 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지금은 예쁘게 보여요.

그렇다면 요즘은 풍경보다 사람을 주로 보시겠네요? 
네, 사람을 많이 봐요. 관찰하기도 하고 연출해보기도 하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아는 분들께 모델을 해 달라고 부탁해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중인데요, 사람의 몸동작과 표정만 그려도 평생 그릴 수 있을 만큼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채로워요. 어떤 몸동작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어떤 동작에서는 그 사람만의 슬픔이, 마음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초상화를 그린다는 건 그 사람의 외형만 그리는 게 아니라 영혼과 마음이 드러나게끔 하는 작업인지라, 모델과 사진을 찍기 전에, 찍을 때, 찍고 나서도 대화를 많이 나눠요. 이 과정은 제게 굉장한 생기를 줘요. 예전에 제가 관찰자에서 멈췄다면 지금은 함께 호흡하고 관계를 맺는 거고, 예전에 작업과 삶이 분리됐다면 이제는 사람과 교감하는 게 작업이자 삶이 됐어요. 어렸을 땐 혼자 작업만 하느라 잘 몰랐는데 점점 사람이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걸 느껴요. 타인을 통해 나를 알 수 있게도 되고요. 내가 어떤 사람의 초상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제 스스로에게 질문하죠.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이 사람을 그리고 싶을까? 이 사람의 어떤 면에 마음이 움직였을까?’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어요.

도시 풍경에서 인물로 그 대상이 변하긴 했지만 결국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건 같다는 말씀이군요. 회화 기법에 변화는 없나요?
기법에도 변화를 주고 있어요. 일단 붓을 가장 뻑뻑하고 거친 붓으로 바꿨는데요, 세밀한 묘사보다는 느낌과 정서를 전달하는 데 집중해서 그리고 있어요. 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보다는 느낌과 정서를 전달하는데 집중하려고 해요. 사진처럼 잘그려서 감탄을 자아내는 회화의 매력도 있지만, 저는 그보다는 마음 어딘가 묵직한 곳을 건드리는 그림으로 관객과 만나고 싶어요. 거기에 가장 적합할 기법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시도하는 중입니다.

사진과 판화 작업도 하셨지만 끝내 회화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언가요?  
사진은 카메라라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거지만 회화는 제 몸이, 제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거죠. 작은 동작에도 너무나도 민감하고 미묘해서 하면 할수록 어렵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게 회화의 매력입니다. 아까 직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했는데, 저는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설명하기 힘든 제 직관과 마음의 어떤 지점들을 엉금엉금 짚으며 나아가고 있어요. 적어도 분명한 건, 그 지점들이 바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이란 거예요. 그림을 안고, 그림을 고민하는 순간들이죠. 앞으로도 그 지점들을 밟으며 계속 그림과 함께 할 생각입니다.

이효연
199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동안 입시학원에서 일을 했다. 작업에 대한 갈증에 혈혈단신 스웨덴으로 건너가 스웨덴 왕립 미술학교(Royal University College of Fine Arts) Project student/Special student 과정을 수료했다. 스웨덴에서 두 번의 개인전 <Inbetween>, <The garden of Ulmme>을 열었고 2007년 한국에 돌아와 도시 풍경을 그리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2008년 <Urbanscape(프라이어스 갤러리)>, 2009년 <Travel Note(닥터박 갤러리)>, 2010년 <Showwindow in Urbanscape(담갤러리)> 등 3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유중아트센터 제2회 입주작가로, 초상화를 새로 선보이는 개인전을 올 가을에 열 계획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김성열 20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닥터박갤러리 전시팀장 김성열

사진
시간 속에서 셔터가 눌리고 시간을 벗어난 순간은 공간에 담긴다. 사진은 시간을 대할 수 있는 것-對象으로 만든다. 빛이 평면에 얹히는 순간은 작가의 손을 벗어나 있다. 그 아주 짧은 순간에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그것이 평면에 얹히기 직전까지 그것은 아직 시간이기 때문이다. 평면에 얹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시간이 아닌 공간이 되고 그것은 작가가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라뇨Lagneau는 “공간은 나의 능력의 형식이며 시간은 나의 무력함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바람
이효연의 작업은 한 때는 나 자신이었던 시간을 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나를 벗어나 내 앞에 던져진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안에서 나의 현재였던 시간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나의 밖에서 나의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과거의 기억을 미래에 기대어 현재에 고쳐 그리는 것이 된다. “물 속을 날고 싶어서 오른쪽 날개를 왼손으로 여러 번 고쳐 그리고 있다.” (Rainy Stockholm 2006_작가노트)
여행
이효연의 작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것은 오래된 현재의 잊혀진 감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것은 시간 밖에서 기억과 더불어 오래된 현재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오래된 감정을 현재에서 살리려는 것이다. 그 여행은 때로는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 시간의 문턱에서 서성거리다 마는 데 그치기도 한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하루>는 1994년의 홍대 앞 거리를 그린 것이다. 작가는 그 시간을 사진첩에서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분명히 익숙한 공간인데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 속에서 사진을 바라보며, 시간 밖에서 기억을 뒤져보지만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려던 시도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그림 속에 자기를 대신해서 그 시간과 그 공간을 현재로서 살아갈 인물을 그려 넣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Venice>는 2004년 베니스의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올려다 본 하늘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모델이 된 사진은 5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작가를 단번에 그 시간으로 데려가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다만, 그 시간은 평면에서 평면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미래에 의해 변형된다. 쪽빛 하늘이 더 잘 보이기를 원하는 바람이 사진에서 전깃줄을 지운 것이다.

이효연 작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한 때 그것이 자기 자신이었던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한 때 나의 현재였던 과거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여행을 지속시키는 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오기 때문이다.


In search of lost time

Kim, Sung-Youl
Exhibition Team Leader, Dr. Park Gallery

Photograph
In time the shutter is pushed and the moment out of time is put in space. A photograph makes time a thing to face-an object. The moment when light is placed on the surface is out of the artist’s hand. In the moment there is nothing the artist can do. It is so because it is still time until it is placed on the surface how short it is. The moment it is placed on the surface, it is no longer time but space and it becomes an object or a problem about which the artist can do something. So Lagneau said that “Space is form of ability but time is the form of disability.”
Hope
Hyo-Youn Lee’s work begins with facing time which was once her in the past. It is to see time getting out of her and thrown in front of her. It is to gaze time which was once the present in her. It is to recall time which has now become the past out of her. So to paint becomes to repaint memories from the past, in the present, depending on the future. “With hope to fly in the water, I am repainting the right wing with my left hand several times.”(Rainy Stockholm 2006_Artist note 2009)​​​​​​​
Travel
Her work is a travel in search of lost time. It is a journey in search of lost feelings from the old present. It is a trial to get into the old present with memories out of time. It is to bring the old feelings to life in the present. Sometimes it is successfully made but sometimes it ends up being around the threshold of the time.

<A day never met before> shows a street around Hong-ik University in 1994. It is said that the artist happened to find the time in an old photo album. The travel has begun. While in time looking at the photograph, out of time looking for memories, the trial to get into the time seems to have been unsuccessful. So she created a character that will live in the old present for her.

<Venice> shows the skies that she happened to look up in an alley in Venice in 2004. It seems that the photograph, the model of the picture, takes her to the time at once despite the time gap of 5years. But the time is transformed by the future while it is moved from the surface to another. The artist’s hope of the blue skies being clearly stood out erased the electrical wires from the photograph.
To the artist painting is a travel searching for the lost time which was once her. But it is not for the past. Rather, it is for the future. It is so because the travel begins with the past which was once her present but the power sustaining the travel comes from the future.


낯선 풍경속에서의 또 다른 하루-김륜아 2008
낯선 풍경 속에서의 또 다른 하루
Written by Kim Loona (ART EXIT senior editor)
현대인은 실존주의적 허무함을 태생적으로 지닌다. “내가 누구인가” 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을 거듭하지만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 라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단순하게 따를 수 없다. 현대의 “나”는 과거 신과 인간의 분리 에서 정의 내려진 포괄적 “인간”의 대명사에서 온전히 “남”과 분리된 독립체로서의 “나”를 표방한다. 나는 언제나 당연하게 “너”를 비롯한 남과 비교해서 달라야 하며, 그와 동시에 “남”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딜레마 속에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 하기 시작할 때 스스로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평가 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위치로 나를 평가 하게 된다. 

이효연은 그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환경을 바꿔 버리는 실험을 한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현재의 지점에서 가장 낯설고 동떨어진 곳을 찾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의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낯선 곳 – 그녀가 지목한 곳은 스웨덴이었다 – 에서 그녀는 이방인과 그 이방인이 사는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urbanscape 이다. 말 그대로 도시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그녀의 작업은 그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포스트모던한 빌딩이 빼곡히 들어찬 현대의 대도시의 풍경이 아니다. 그 곳은 어딘가 낯설고 정적이며 또한 고독하다.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낯섦’이란 감정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이웃인 동시에 이방인이다. 필연적으로 타자를 익명화 하고 자신 조차 제 이름을 버려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언제나 공허한 갈증을 느낀다. 익명성에 익숙해져 버린 도시인에게는 낯섦은 그들이 가지는 정체성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하게 삭막하고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감정들, 그것은 분명 외롭고 고독할지라도 매일을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로 결코 메마른 것은 아니다. 그런 도시의 삶을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과 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낡은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은 어딘지 쓸쓸한 익명화 되어버린 군상들이다. 늘 누군가와의 조우를 꿈꾸는 외로운 여행자 모습을 한 그 이방인들은 동시에 작가의 모습이자,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작업을 캔버스로 옮기기 전 선행되는 사진드로잉을 보면 사진 속의 이미지들이 임의대로 삭제 되고 이동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시선에 갇힌 이방인과 풍경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 되면서 마치 무대 위의 장면처럼 연출된다. 이런 생경한 화면 구성이 이국적 풍경과 이방인의 모습과 함께 낯선 감정을 이끌어 낸다.

이효연은 이렇게 같은 풍경이라도 다른 구도와 시선으로 바라볼 때 지루하고 삭막한 매일의 연장이 아닌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낯선 풍경 속에서 조우한 타인의 뒷모습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은 마치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풍경은 그저 ‘도시의 풍경’ 이 아니라, ‘도시인이 살고 있는 풍경’이 된다. 즉, 도시인은 이런 실존주의적 허무함 속에서 남을 쫓는 시선의 끝에서 나를 발견하고 확인함으로써,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위로 하게 된다.
People today are born with a sense of existentialist emptiness. They ceaselessly question to understand "who they are" yet one cannot simply accept the idea of "I think therefore I am". Today's "I" represents "I" as an independent body completely separate from "others" as pronouns of comprehensive "human beings" defined in separation between God and human beings in the past. I always should be different from comparisons with others including "you" naturally and at the same time fall into a dilemma that I should live a universal life which is not different from that of "others". That is why one evaluates oneself in comparison with others and as a member of the society at one's status when making questions who I am.

Lee hyoyoun experiments to change the environment to objectively look into herself. She spread the map of the world, found the most strange and remotest from where she was, and travelled to a place where there was no one she knew. In the place whose sky, land and people are all strange – the place she spotted was Sweden– she began to draw the strangers and the world the strangers live in. That is the Urbanscape. Her works moving the urban landscape to the drawing as the title suggests are not about the scenery of the modern metropolitan cities full of busy people and post-modern buildings. The place is somewhat strange, static, and lonely. It is the sentiment of 'strangeness' that penetrates her works.

For modern people living in cities the existence of others is neighbor and stranger at the same time. Human beings always feel the hollow thirst in modern society where others become nameless and they throw even their names away by necessity. To urbanites accustomed to namelessness, strangeness has become one of the identities they have. But this does not feel just desolate and cold. The sentiments you cannot escape from living in the modern times, and they may be certainly lonely and solitary but never dry as stories from just living day by day. She observes the urban life with detached eyes. Buildings whose identities are unknown and the people passing by, and the backs going up the old stairs are crowds somewhat desolate and nameless. Strangers in the form of lonely travellers always dreaming of an encounter with someone can be said to be the figure of the painter and the modern people.

Looking at the picture drawings carried out before moving the work to the canvas, we see that images in the pictures have been erased and moved at random. The strangers and scenery locked in her gazes are reconstructed according to the intention of the painter and presented as scenes on a stage. Such a vivid construction of the canvas invokes strange sentiments along with exotic sceneries and figures of strangers.

Lee hyoyoun tells us that even the same scenery when looked with different composition and sights can be another day's start, not an extension of boring and desolate everyday. The backs of the strangers who met encounters with strange sceneries and the moments passing by can be projected as if they were appearances of themselves just like the mirrors. Thus her sceneries are not just 'urban landscape' but become 'the landscape the urbanites dwell on'. In other words, the urbanites come to solace the lives of their own and others by finding and identifying themselves at the end of sights seeking after others in the midst of a sense of existentialist emptiness.

在一陌生景中的另一天
今的人有一尊在主意的空。他不多的疑去理解,而一人却不能简单的接受康德哲我思故我在点。
今 天的代表了就作完全立于其他人的一,像是全面的的宣言是将过去的分而定的。我常常应该使自己在与别人 相比较时得不同,自然包括且同时处于一种进退谷的境地:我应该过种并区别人的大的生活。那就是在与别人比较时自己的 价,而且在提我是是作成的身
  李 孝燕 试图去改变环审视自我。世界地图发现了最奇怪的是自于里,旅游到了完全陌生的地方。那里的天、土地和人都很奇怪——家就是瑞士——她开画这里的陌生人和他所居住的世界。那是城市的景象。的作品城市的景象移到了中,就像标题中所提到的,不是于充 忙碌人群和后代建筑的代大都景象。这个地方有些陌生、静态和孤是看懂她作品的人的一陌生的情
  代人同他居和陌生人同 居住在城市之中。人类经常在代社到一渴望,在设个人都有了名字,他甚至的名字抛弃掉。经习惯无名和陌生的城市人来说些已经变成了他的一象征。但是这并不只是荒凉和寒冷,你这代的都市就无法逃避这种且他可能理所然的孤和隔但是想日一 日的生活故事一的干枯。用一分离的眼光去审视城市的生活。不知名的建筑,人们与之擦肩而,在后面呈除古老的梯,人是冷漠和无名的。以孤的 旅游者的形式出的陌生人想着能遇某些能被成是家的或者是代人的人物形象。
  看着未移到帆布上的完成的面,我见图画中的形象已经别任意抹掉或者移了。陌生人和那景象被在了作者的重,通过画家的意图进行了重这样具有生动结构的帆布痛外的景象以及陌生人的形象一道起了我陌生的情
李 孝燕 告面如果不同的方向和野中去看,就是另一天的始,不是每一天的厌烦和荒凉的展。在陌生景象中遇了陌生人的陌生人的背面以及擦 肩而的瞬,可以被看做是他子中看自己的形象。这样她不只是城市的景象,而且成了城市人居住的景象。话说,城市人始安慰自己和 人的生活,通在最后一眼找和证实自己,在存在的无中在朦的景象中的其他人的身后去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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